갤러리 내일에서 10월 16일 부터 22일 까지 김종열 개인전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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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55.5x75.5 종이에 혼합재료
옛날 옛적에 55.5x75.5 종이에 혼합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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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풍경, 또는 마음 밭의 지형도 -김종열의 회화 세계
서길헌(조형예술학박사)
화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의 그림은 풍경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풍경이겠지만 그 풍경은 몹시 구체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는 그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구체적이기에 구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뚜렷한 그 무엇에 대응하는 형상이 아니기에 오히려 추상에 가깝다. 구체적인 추상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대개 형용모순은 반어법적 호소력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모순되게 말을 함으로써 말하고 싶은 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한다. 그의 그림에서 반어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어떤 형상을 가진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무형의 내면을 암시하는 추상이라는 형식이 결과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추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추상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것은 화가에게 어떤 의미를 띠고 구체화하는 것일까. 작가 김종열은 자신이 그린 마음의 풍경에 스스로 놀란다. 이것은 무엇일까. 대체 이토록 끊이지 않고 스며 나오는 미지의 골과 이랑과 거기 자라는 무성한 식물성 세포와 줄기들이 이루는 구체적인 풍경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그의 화면은 기이한 촉감과 세상에 없는 듯한 특이한 풍경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풍경을 이루는 줄기와 뼈대들은 꼬물꼬물하고 미세한 선들로 빈틈없이 짜여있다. 그 선들은 화면을 채우고 있는 어떤 구조적인 생명체의 구석구석에 에너지와 생체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온몸에 걸쳐 균질하게 뻗쳐있다. 각각의 마디나 매듭, 혹은 옹이의 역할을 하는 부위에서 새로이 움트는 선들은 각자의 촉수를 뻗어 다른 선들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어 새로운 다발의 지체들로 엮인다. 그것들은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는 섬유질의 줄기나 타래로 연결되며 종횡으로 불어나 더 크고 깊은 용적의 공간으로 증폭된다. 그렇게 스스로 자라고 불어나 하나하나의 화면들을 채우는 각각 색다르고 특이한 이미지들은 정적인 형태로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풍경들을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은 빽빽한 밀도의 세포들로 빈틈없이 짜인 정의할 수 없는 질감의 살을 이루며 사방으로 세력을 뻗어 움직이는 몸집으로 자라나고, 어떤 것은 모종의 전체를 거의 완성하기 직전에 문득 세찬 비바람이나 태풍을 맞고 와해하려는 몸통을 몸서리치며 극적으로 추스르는 듯한 형용을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학적 지형도이자 마음 밭의 풍경이다. 마음 밭의 풍경은 애초부터 계획된 형태를 갖추지 않고 끊임없이 화가의 손끝에서 그때그때 조금씩 진화해 왔다. 아마도 우연하고도 필연적인 여러 심리적인 계기들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아우성치다가 그의 손이 잡은 볼펜 끝의 출구를 통해 지면으로 술술 실타래처럼 풀려나왔을 무수한 선들은 화면 위에서 유기적 생김의 몸체로 하나씩 구체화 되어왔다. 그가 2017년에 발표한 전시에서 보여준 ‘약동하는 유기체’를 이루는 자유분방한 ‘펜질’의 선이 짜내던 얽히고설킨 섬유질의 유기적 구조물들은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도 한층 더 깊고 두꺼운 공간의 안팎을 넘나들며 더욱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차원의 구조로 불어나 있다.
생계를 위한 일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언제라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종이컵이나 손쉽게 다룰 수 있는 포장지 등에 펜으로 무심하게 그어나가던 선들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나감에 따라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쉬지 않고 그 선들을 살리고 이어나갔다. 홀로 30여 년 정도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그리는 일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해오던 차에, 우연히 파일롯트 일제 0.3밀리 수성 겔잉크 볼펜으로 낙서를 하다가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검고 가는 선을 마술처럼 줄줄이 쏟아내는 그 흑색 롤러 볼펜의 감촉에 매료되고, 그리고 나중에는 0.4밀리 컬러 볼펜을 함께 사용하여 좀 더 다채로운 느낌의 자동기술법으로 10~15년 그렇게 몰두하여 그리다 보니, 그는 자신이 수성 볼펜으로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한 윤곽과 정체를 어렴풋이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볼펜이 자신의 감각 자체가 되어 뽑아내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내면 풍경이었다. 볼펜이 그리는 선은 직접 손끝의 움직임과 하나가 되어 그의 신체의 일부처럼 움직인다. 그러기에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손끝으로 화면 전체를 훑어가듯이 접촉하는 것과 같기에 무수한 펜질의 결과로서의 화면은 몸체와 매체가 직접 만나 이루어내는 오체투지의 현장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 또는 내면을 마음 밭으로 은유하는 일은 여러 의미를 띤다. 이는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공간적으로 시각화시켜 심리적인 움직임이나 정신의 활동을 비유하는 것으로서 불가에서는 교화의 방편으로 사람의 번뇌와 망상 등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그 마음을 다스리고 수양하라는 가르침으로서 마음 밭을 잘 일구어야 한다는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개념을 밭이라는 공간으로 시각화하여 매우 효과적으로 눈에 보이는 가상의 이미지로 만든다. 김종열의 그림 또한 그런 점에서 심리적으로 알 길 없는 마음의 풍경을 공간적으로 치환하여 풀어낸다. 이성과 논리의 통제를 벗어나고자 하는 수단의 하나로 초현실주의에서 나온 자동기술법은 이러한 마음의 순수한 파장을 지진계의 바늘처럼 그려낸다는 의미에서 마음의 미세한 진동을 기록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가느다란 선을 그리는 볼펜을 쥐고 무엇인가를 그려가는 것은 마음의 주파수를 그려내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화가 김종열은 그러한 기법으로 자아내는 선들을 자연스럽게 연속적으로 조합하여 더 높은 차원의 조형 의지를 갖춘 짜임새 있는 어떤 형태로 이끌어나간다. 여기에는 물론 펜을 쥔 화가의 감각기관으로서의 손이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자율의지를 가진 자유로운 선의 조형 질서가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여 갖추어가는 자율적 세포증식과 같다. 화가의 손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러한 자연 발생적인 조형 의지로서의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거미가 자신의 신체에서 끈끈이 줄을 뽑아내어 공간을 포획하듯이 화가의 ‘펜질’ 행위 자체가 영토를 확장하며 피부를 만들고 섬유질의 신경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조직의 피륙을 짜는 일과 같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자신의 전 존재를 펼쳐서 자신의 영토를 마련하는 일이다. 이는 허공에 몸을 받아 나온 정신이 거주하는 영혼의 집을 짓기 위해 존재의 피륙을 짜는 작업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일은 사람이 살아내야 하고, 살면서 거쳐 가야 하고, 겪어야 할 땅이기에 마땅히 그것을 개척해야 하는 지상의 과업이다. 자신이 발 디딘 땅을 거쳐서 사는 동안 어떤 미지의 만남과 마주치고 그것을 마음 밖으로 꺼내어 뚜렷하게 겪으며 살아야만 하는 숙명적 과제와 같은 그 무엇이다. 그렇게 밟고 거쳐 가야 할 길이 되어주는 섬유질의 결이나 광물질의 독특한 복합적 구조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의미는 결국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전인미답의 땅이나, 해저의 경이로운 산호초지대 또는 우주 창조의 순간과 같은 대폭발이 이뤄내는 무시무시한 카오스와도 같은 순간적 풍경으로서 사람의 마음 바닥을 반석같이 받쳐주는 디딤돌과도 같다. 또는 존재의 몸집을 단단히 둘러싸는 쐐기풀 갑옷과 같다. 그것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비추는 마음속에서의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거주하는 깊고 깊은 곳의 심리학적 영역이며, 그림으로 풀려나와 형태를 갖추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잠재적 영토이다.
지형도는 땅의 생김새인 지형을 기록한다. 그의 그림 또한 마음의 지형도로서 마음의 기복과 고저, 골짜기와 능선 등이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으로 나타나 있다. 지형도에는 지형의 물리적인 기복뿐만 아니라 가옥이나 도로, 철도, 하천 등 땅 위의 물상과 식생, 그리고 자연과 인문에 관계되는 중요한 정보까지도 모두 표현되듯이, 그의 마음의 지형도에도 역시 그 자신의 내면의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그것은 물론 마음 밭으로서 작가가 실을 자아내듯 뽑아내며 다스리고 쟁기로 갈아서 경작함으로써 가꾸어낸 결과로서의 마음의 풍경이다. 원래 서양화에서 등장한 ‘풍경화’에서의 ‘풍경’이라는 개념에는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의 경치가 아닌 인간의 눈으로 재단하고 인간적 질서에 따라 정돈된 경치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풍경이라는 것도 사실은 화가가 마음속에 두서없는 혼돈의 상태로 내재한 채 아우성치던 여러 모습의 심리학적 지형들을 재정렬하여 경작해낸 마음 밭과 같다.
결혼한 지 거의 자신의 화력과 같은 30여 년, 예술가로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많은 갈등 끝에 독실한 크리스찬인 부인과의 화해를 위해,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친형의 죽음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 마음의 평안과 구원을 깊이 바랐지만, 그는 어딘가 사람 중심으로 너무 사회화된 현대 종교의 형식에 이따금 회의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형식 문제를 떠나 화가로 살면서 진정한 종교적 구원과 상충하지 않고 인생의 숙제로서 탐구해야 할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몰두하고자 하였다. 생계를 위해 하는 일에 시계와 같은 리듬을 따라 성실하게 땀을 쏟고 남은 시간엔 정갈한 마음으로 빈 화면과 마주 앉아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따라 팔과 손이 가는 대로 펜을 움직여 선을 그리고 선을 이어 면을 만들고 면을 조합하여 영토를 짓는 동안, 그는 그것이 요컨대 자신의 마음을 단단하게 짓고 다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가로서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마음의 풍경을 꺼내어 풀어놓고, 그것을 모두 정돈하여 펼쳐놓고 난 뒤에는 홀가분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가 떠나기 전에 기어코 일궈놓게 될 화가의 마음 밭은 미지의 연옥에서 모두 풀려나 문득 그의 앞에 낙토의 지형도처럼 펼쳐지고야 말 것이다.
<전시 전경>
세상에 나온것이 내 의지와 무관함인가?
어릴적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지만 주로 혼자 돌아다니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하늘의 구름, 부딪치는 파도, 끝없이 펼쳐지는 백사장의 고운 모래들.. 그들을 주워 담기에 급급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냄새와 눈에 보이는 형형색색의 향연이 내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섬]이라는 환경, 육지와의 거리는 다른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 하였으며 '내' 상상력을 키워주는 근간이 되었다
밤 하늘에 떠 있는 수 많은 별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
엄마는 돌아가셨다. 아주 일찍.
어느 저녁 날,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 온 아버지는 내게 '엄마는 나비가 되었다'고 했다 그 후로 난 유독 배추 흰나비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났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
작가노트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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